② 바울의 죽음에 참예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
그래서 빌립보 3장에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“이제 이전에 가치로 삼았던 것은 다 똥오줌과 같이 배설물로 이제 다 여기게 됐다.” 이거는 왜? ‘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얻어지는 그것이 참 가치 있고 진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한다.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것으로 내가 지식할라 하고 있다. 그 외의 거는 다 잘못 아는 거 소용 없다. 그 안에서 이렇다 저렇다 하면은 이렇다 하면 이렇고, 저렇다 하면 저렇고 그 안에 있는 지식으로 나는 정평 정가로 알고서 한다.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의 고난에 내가 참여해서 그리스도의 그 부활의 권능에 내가 참여할라고 하고 있다.’
그러면 그리스도가 그 고난을 절정으로 말하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 절정인데, 죽은 것이 절정 그 죽음은 일면적으로는 우리의 형을 담당한 그것도 있지마는 일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전지의 입법의 그 공심판을 통과한 완전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응해 드리는 이 역사도 있다.
이래서, 속사람으로 이거 죽지 안할 그 사람으로 사니까 여러 가지 이 죽은 사람들만 가득 찬 세상에서는 마찰이 되어졌다.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이 우리의 죄값으로 못박히신 동시에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대행할라고 하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라고 하니까 여러 가지 마찰들이 많이 오게 됐다.
그러기 때문에 “그리스도의 그 죽음에 동참해서” 그 말은 주님이 이 모든 죄악과 사망에 마찰이 되고 정반대가 되는 영감과 진리대로의 이 생활을 함으로 여러 가지 고난당하는 그 고난을 나도 그 고난을 지금 참예해서 그 고난을 당할라고 한다.
내가 예수님이 대속했으나 나도 죄의 댓가로 당하는 그 고난 당하고, 예수님은 공심판에 해결하는 죄의 형이지마는 우리들은 대속해 놓은 그 죄의 형을 내 속에 있는 죄되는 그런 것을 죽여 멸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의 값을 받게 된다. 또 의를 행하기 위한 그런 어려움을 받게 된다.
이래서 어짜든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예, 그 죽음의 그 고난에, 죽음의 고난에 참예해 가지고 내가 나도 그리스도의 그 부활의 권능에 참예할라고 하고 있다. 그러면 주님이 이렇게 이 전투를 최고 최후의 완전 승리를 한 것처럼 나도 승리해서 이제 완전히 모든 것을 이기는, 나를 이기고 내 밖에 있는 모든 세상과 피조물들을 다 이기는 이 승리를 완성할라고 나도 지금 노력하고 있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.